'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고독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8월 우린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함께 읽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은 2008~2009년 약 2년에 걸쳐 2주에 한 번씩 이탈리아 잡지에 기고했던 편지글을 모아 엮은 글이다.

책을 쓰던 당시 작가는 이미 80을 훌쩍 넘긴 나이였는데 그의 사회를 분석하는 뛰어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인식이 놀라웠다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보여준 저자에게 감사. 우린 아직 20년 넘게 남았다)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지혜의 편지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가 고독, 세대 간의 대화, 온라인과 오프라인, 트위터, 인스턴트 섹스, 프라이버시, 소비, 자유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 유행, 소비지상주의, 건강과 불평등, 신종 플루, 예측 불가능한 일과 예측불가능하지 않은 일들, 공포증, 운명과 성격, 불황의 끝 등에 대해 그 의미를 짚고, 오늘이 어떤 미래를 빚어낼 것인가를 알아듣게 설명해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 우리는 방금 지그문트 바우만이 보낸 44통의 편지를 받았다. (장석주, 시인이며 에세이스트)


추천의 글에서 보듯 44통의 편지는 우리도 한번쯤 고민해 보았거나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를 다양하게 제시하며 우리를 생각의 숲으로 안내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유동하는 현대사회'라 규정하는데 그 핵심은 변화에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계는 오늘은 확실하고 적절해 보이는 것이 내일이면 쓸데없고 엉뚱하고 후회스런 실수로 보이기 십상이어서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도 '유연한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며 두 가지 이야기 유형을 제시하는데, 자신의 글은 농부가 들려주는 뱃사람의 이야기라는 말이 재미있었다.


뱃사람 이야기가 한 번도 들어보거나 가본 적 없는 별난 것에 관한 이야기라면 

농부의 이야기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여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고 거기서 새롭게 깨달을 만한 점은 없으리라 예상하는 이야기를 뜻한다고 한다.


결국 농부가 들려주는 뱃사람이야기란 가장 평범한 삶으로부터 건저낸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놓칠 뻔한 특별함을 눈 앞에 드러내어 밝히려 하는 것으로, 익숙해 보이는 것에 진정으로 익숙해지고 싶다면 먼저 그 익숙함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면 첫 해 몇 개월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낯설게 보이며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던 경험들!!


이 책은 그런 날카롭지만 설득력있는 분석으로 독자를 이끈다.


수목을 돌보기 위해 30대 이미 사람들과 떨어진 교외로 가 살아야 했던 친구는 그렇게 혼자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가를 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 숙성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요즘의 젊은이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도 젊은 날엔 주어진 역할이 많아 자신과 마주하기는 커녕 늘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며 살던 것을 상기시키던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지금이 고맙다고...


조용히 앉아본 후에야 

지난 삶이 얼마나 수선스러웠는지 알겠노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친구들과 따로 또 함께(단톡으로) 걷기를 하면서

걷는 동안 주변을 관찰하고, 이런저런 생각의 물줄기를 따라 가기도 하고, 

때론 멍도 때리면서 혼자 걷는 이 시간이 얼마나 좋은가를 느낀다.

가끔 걷는 길에 만나는 한 할머니는 나보고 왜 늘 혼자 다니냐며, 

같이 걸을 친구가 없는거냐? 측은하게 물어보지만,

그 길에 결코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할머니에게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이제야 나는 스스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고독(?) 속에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을 느끼던 또 다른 친구는 리차드 로티의 글을 인용하며 더불어 삶의 가치를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우리가 제 손을 더럽히며 우리의 변기를 닦는 사람보다 열 곱절 많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 '제3세계'에서 우리의 키보드를 조립하는 사람보다 백곱절 많은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저 자신의 운과 다른 아이들의 운이 그렇게 다른 것이 그 불평등이 '신의 뜻'도 아니고 경제적 효율에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도 아닌 필연적인 비극임을 어릴 때부터 배워 알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누군가 과식하는 동안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으려면 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가능한 어릴 때부터 궁리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은 이런 사실에 진즉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했던 친구들. 이것이 중요하고 아이들에게 일깨워줘야 할 가르침이란 것을 알면서도 우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상대가들으면 거북해 할 진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는 그냥 자신만의 이야기로 남겨둔 채 우리는 '좋은 게 좋은거'라는 식으로 사고하며 너무 순응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런 삶의 태도는 한나 아렌크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을 떠오르게 한다.


유태인 학살의 전범인 아이히만을 재판하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형적인 악마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며 일말의 회의는 커녕 자신의 탁월한 일처리에 자부를 느낀 사람이면 당연히 그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도 아주 다른 사람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웬걸!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는 자녀에겐 다정한 아빠였고 이웃에겐 좋은 사람이었으며 친구들에겐 무척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권위에 충성했던 인물!!!


평범한 누구도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끔찍한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에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

옳은 것은 소수의 말이어도 옳다고 인정하고

아닌 것은 다수가 지지한다해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권위는 무조건 존중되어야 하는가?


아이히만 재판 후 심리학자들도 이런 심리현상에 무척 큰 관심을 보이며 이후 선과 악에 대해 실험실에서 많은 실험들이 있었단다. 

그 중 스탠포드대학에서 사람을 임의로 죄수와 간수집단으로 나눠했었던 실험이 잘 알려져 있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간수집단에서 보인 잔혹한 행동에는 죄의식이나 상대 집단에 대한 연민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ebs에서도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을 시청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결과가 무척 흥미로웠다고 하더라.


26번째 편지인 묵은해 유령과 새해 유령의 새해 소망을 언급하며

자신의 소망이 인류라는 큰 목표가 아닌 가족에 국한 한 것임을 말한 친구가 있었다.

인류가 아닌 구체적 인간을 사랑하는 친구가 내겐 더 친근하고 다정스럽다.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잘 해 내는 것, 그리고 그 범위를 조금씩 더 넓혀나가겠다는 친구들 말에 우리 모두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들과 경제적 후원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봉사는 마음을 나누는 일이요, 필요한 곳에 함께 있어 주는 일임을 공감했다.


책을 목차대로 읽지 않고 끌리는 편지를 골라 읽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가장 관심이 있었다는 편지는 19번 째 '약 주고 병 주기'

그 친구는 특히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기사를 언급했다.


'최근 제약회사들은 시장을 확장하는 새롭고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완성했다.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홍보하는 대신, 약에 꼭 맞는 질병을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이용해 돈을 버는 제약회사의 행태를 알면서도 우린 여기에 또 넘어간다.


신종 플루때처럼 지금의 코로나 19상황에 거대 제약회사들이 위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각국의 정치가들과 결탁하여 그 부담은 오롯이 훗 날의 국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사람들의 불안을 먹이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 비단 정치나 경제뿐일까?

그래서 뉴스나 광고를 보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 외에도 38번째 편지인 로나의 침묵이 좋았다는 친구가 있었고

버락 오바마라는 현상, 운명과 인격등에 대한 생각을 말한 친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44통의 편지가 다 공감가는 것은 아니었다.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편지나 지루한 내용은 그냥 글자만 읽었다.

잡지 기고글이란 특성의 한계도 느껴지고,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전개된 분석방식이 썩 마음에 닿지 않은 글도 있었다.

하지만 고독의 가치, 세대에 대한 분석, 소비에 대한 생각이나 교육에 대한 분석등은 참 좋았다.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로 아픈데도 얼굴 보고 싶다고 잠시 다녀간 친구야, 얼른 나아라!

이젠 글씨보는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친구야, 

이렇게 글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허락될까?

입시 공부하듯 밑줄 좍쫙 그으며 열심히 읽었다는 그녀에게 감사를 보낸다.

이 글을 읽으며 가끔은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친구야. 꼭 실천하기 바란다.

저자를 보며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친구야. 

약간의 용기를 내면 우린 아직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는데 나도 동의한다.

책 읽은 소감을 전체적으로 분석해주어 우리 귀를 쫑긋하게 했는데, 

그 놈의 마이크 탓인지 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하는 바람에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친구야,

기계치라 자책하지 마라. 

사실 우린 다 기계치란다. 그래도 이만하면 훌륭하게 잘 사는 것 아니니?


사물의 가치는 바로 그 사물을 회득하기 위해 요구되는 희생의 크기로 특정된다.


쉽게 얻은 것엔 금방 싫증을 내거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삶에서 가치있는 것들은 오래 공들여야 하는 법!


유동하는 현대에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새 것은 금방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지만

변화하는 것은 결국 방법이나 형태일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우정이라던가 믿음, 신뢰,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같은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의미를 준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살려고 애써야하고 건강한 마음과 정신을 지녀야하지.

우리의 책 읽기와 걷기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거야. 


9월엔 경옥이가 좋은 책을 추천해 주었어. (경옥아 고마워!!!)

박혜윤이 쓴 <숲속의 자본주의자.>

근데 나도 이 책을 아직 읽지는 못하고 서평만 보았는데 평이 참 좋더라.

6월에 나온 책이라 도서관에 아직 구비되지 않은 곳이 많고, 

신상이라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출순서를 기다려야 할거야.


그래서 책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위해 10월에 읽자.


대신 9월엔 추석도 있으니 가볍게 읽으며 가슴을 따스하게 해 줄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추천해


일단 책장이 훌훌 넘어가고 글이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고 할까?


유동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챙기고 살아야 할 알맹이가 무엇일까를 보여주는 책이란 생각이 들어.


9월 모임은 28일 8시 반 듀오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