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 아이러브스쿨 게시판담당 : 김영자
십년전이다. 한국요들인 세명이 찾아왔다.
스위스 요들과 스위스 를 너무 좋아해서 스위스를 몇년에 한번씩 꼭 찾아와야 한다고.
안그러면 스위스 홈씨크 병이 난다고 한다.
마침 스위스 요들협회 창립
100 주년 기념 행사가 베른에서 있었다.
같이 기차를 타고 베른 행사장을 가는데 요들책을 번역했다며 좀 어떤지 보라고 하며 건네 준다.
번역초본 인데 대강 읽어보니 문장들이 아주 이상했다. 이렇게 설명하면 틀리는데….
독일어를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다고 한다.
스위스 저자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요들가수 겸 작곡가인데 번역허가 를 받았는가고 물으니
그런건 미처 생각 못 했다고 한다.
결국 번역허가 를 내가 중간에서 해 주기로 하고
번역도 보아주기로 하고 그들은 며칠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번역허가가 없으면 번역할 필요가 없으니 일단 먼저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야 자세히 읽어보니 번역문은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 다시 해야 했다.
스위스 특유의 언어 이어서 독일 사람도 잘 이해 못하는 부문을
독어전공 한국인이 했으니 이해는 충분히 했다.
그렇지만 번역은 제대로 해야 하고 또 보아주겠다 약속도 했으니
그해 한 여름 은 손가락이 부러져라 하고 번역했다.
번역 허가 뿐만 아니라 문장 이해를 위해 저자를 만나러 수차레 찾아갔었다.
가깝지도 않은 그 산간지방을 꼬불 꼬불 다녀오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6 주 여름 휴가를 번역일로 때우고 드디어 번역초본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한국에서 소식이 없다.
휴가중 인터넷이 안되어 손으로 써서 그런가?
몇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영 소식이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뭐 아쉬우면 그제야 연락이 온다.
그러다가 아쉬움 채우고 가면 또 소식이 없는게 자주 있는 일이긴 한데
.
또 몇년이 지나고 나니 다시 연락이 왔다.
스위스에 와서 요들 개인지도를 받고 싶다 해서 내 친구 스위스 요들 선생님을 소개 해 주었다.
차로 데려다 주고 레슨 받을때 즉석번역도 해 주었다.
내가 먼저 요들책자 번역은 얼마나 진행 되었는가고 물으니 진행중이라고 만 대답한다.
내가 보낸 번역이 어땠나 고 물으니 매우 난처한 얼굴이다.
*한국요들인 = 한요인
한요인: 그게요….. 실은 문제가 좀 있어요.
나: 문제
? 무슨 문제요? 손글씨 라 읽기 힘들었나요? 깨끗이 쓰느라고 했는데.
한요인: 그게 아니라 내용이…
나: 내용? 번역 제대로 한건데… 저자랑 직접 의논도 했고.
한요인: 그게 아니라… 한국말 이요.
나: 한국말?
한요인: 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안쓰는 말이어서…. 단어도 옛날식 이고…
쇼크 받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그후부터 나는 한국말에 자신이 없어졌다.
책자는 아직도 출간 되지 않고 있지만 올해 2020년 안으로 출간 한다고 한다.
내 번역이 어덯게 수정 되어 나올른지 매우 매우 궁금하다.
오노 선생님 얘기를 하니, 옛날 생각이 나네.
대전 여행을 하실 때에는 유성에 묵으시게 하고, 내 연구실 모든 학생과 함께 계룡산을 올랐다. 새벽 2시
까닭은 이분이 신실한 불교인이었기에 동학사 새벽예불을 보여드리고자 함.
새벽예불이 3시에 시작하는건 알았으나, 미리 절에 연락드리고 관람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
3시 경에 동학사에 당도했는데... 어둠 속에 세사람이 서있다.
인사를 드리고 배재대학교 교수가 일본대학 원로교수님을 모시고 새벽에 올라온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바로 주지스님!!
대웅전에 들어가 예불을 관람하라고 직접 허락해 주신다.
오노선생님은 캠코더를 꺼내 한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백여명 앉아서 새벽예불 드리는 광경을 녹화하고
나는 TV에서만 보던 장면을 눈 앞에 목도하고 경건, 숙연해졌다. 무엇보다....
예불의 시작을 알리는.... 목어 치는 소리/ 큰종 타종 소리 등등, 타악기가 순차적으로 고요한 계룡산을 깨우던 그 장엄한 감동은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 어른도 우리의 이런 대접에 여러모로 답해 주셨다.
쿠마모토대학 임해연구소 (마쓰시마 =松島 소재)에 초청해주셔서, 우리과 2학년 학생들을 몽땅 데리고 갔다.
물론 경비는 배재대학이 냈지만, 멋쟁이 할아버지 오노선생은 (외모는 딱! 배일집)
내비 등으로 한껏 멋을 낸 (당시는 일본에서도 rare) 새로 구입한 BMW에 나를 탑승시키고는
아리아케 카이(=有明海, 우리나라 다도해와 연결된 바다)의 다도해 섬들을 연결하는 연육교들을 달려주셨다.
물론... 클라식 음악 CD를 쾅쾅 울리며..... Yes, of course!!
(이때는 이미, 정성진이 쿠마모토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라, 미리 렌트해 놓은 큰 차로
수강자들 모두 함께, 아소산의 일본 100대 온천들 중 몇도 다니고, 지금도 유황 냄새 지독한 아소산에도 올랐다.
물론 나의 최애는 마쓰시마 임해연구소에서 일본인 교수들이 했던 특강들~)
최근 아소산이 한번 터졌던 일을 기억하시는지...
아소산 밑에 있는 쿠마모토...라는 도시도, 홍수에 화산에 지진에, 요 근래엔 정신 없지 뭐- (기후 이변?)
쿠마모토대학(= 우리나라의 제주대학이지)과 자매를 맺어 이 도시에 다니게 되니
서방님 왈; 우리나라 사람 가장 많이 죽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도시니까.... 알고 가라ㅎㅎ
원래 큐슈섬은 우리나라에서 다니기가 쉬워요 (양말짝같은 일본 지도에서 엄지 발가락 부분)
비행기 대신 부산에서 배를 타지요, 비틀(딱정벌레호?). 배를 타는 경우 자전거도 싣고 우리나라에서 옆도시 가듯... 함.
주말에 가서 쇼핑하고 오는 식.
우리 문화가 세계에 우뚝 드러나고, 삼성 LG 등 만드는 제품 또한 그러니,
요즘 한국 젊은이 혹은 어린 사람들은 일본을 앞선 나라라고 보는 시각이 없다오.
우리 배재가 쿠마모토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여러모로 협력하고 있을 때,
일본 문부성장학금을 주어 내 학생 정성진을 쿠마모토로 유학하게 해주신 오노 센세이는 실은 내 지도교수 이인규 선생님의 오랜 친구.
이토록 큰 장학금을 타게 해줬으니... 이분은 나에게 귀한 VIP가 되셨다.
몇차례 한국에 초대하고 정성진 부모님과 함께 정성껏 대접하였다.
인사동에 모시는 날, 인천어머니를 올라오시라 하였는데, 어머니가 경성사범 졸업 시에 일본어 특기상을 타신 이력 때문.
ㅎㅎ어머니는 평소처럼 (일본여자 같은 예의를 차려가면서) 손님 응대를 하였는데...
오노 선생님 말씀; 자당께서 전쟁 전 일어를 쓰시는군요! 와~~ 정말 웃으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