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며칠 전 봄날 단체방에 미선 선배님이 사진 한 장을 올려주셨다.
순간 까맣게 잊고 있던 시간의 화살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박정희 할머니 화가
순애 선배님의 어머니이자 우리들의 어머니
내가 한국 방문을 하던 그해 친정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셨다.
가을 무렵이었는데 어머니를 윌체어에 태워드리고 감나무 우거진 병원 마당을 산책하던 날 친구 인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재야, 화실에 가자.
-느닷없이 화실은 왜.
-그림 구경 가자고.
이렇게 시작된 그날 우리는인천 화평동에 자리한 박정희 할머니 화실에 가서 그림 구경을 하고 그림도 몇 점 사고 할머니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한글 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
남편은 소문난 양심 의사 유영호 박사
예순의 나이로 수채화가 데뷔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아이 가진 엄마들에게 교과서 같은 책이란다.
세상에 보고 느끼는 것이 모두 아름답고 과분할 만큼 행복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는 할머니의 고백을 들으며 과연 나는 저런 열정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디카시를 쓰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
특별히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 고 하신 그 말씀이 장미꽃 그림 위로 비쳐온다.
죽을 성 싶던 장미 나무를 다치지 않게 캐내어 그림으로 다시 살려내는 그 정성
한국전쟁 때 피난와 인천에 뿌리를 내리고 이십 여 명이 넘는 대가족 살림을 하셨다는데 나도 한때 둘째 아이를 낳고 여덟 명 살림을 할 때 늘 불평하던 그 시간이 떠올라 스스로 반성해본다.
박정희 할머니
천국에서도 모든 일을 즐겁게 하시겠지요.
[시골 목사님 아드님인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말썽꾸러기 목사아들 이야기가 올라왔는데,
그것을 읽고, 목사님 자손들인 우리 사촌들 톡방에서 다음의 얘기가 올랐습니다.
2021년 6월 1일 고도원의 아침편지
학교에서 내가 또 어떤 말썽을 부렸는지
버니가 방과 후에 어머니에게 죄다 일러바칠까 나는 항상 걱정해야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우리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버니가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프랭클린이 오늘 또 싸웠어요."
나는 버니가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걸 들었다.
"얘가 어떤 애 입을 때렸어요."
-프랭클린 그래함의《이유 있는 반항아》중에서 -
* 반항아, 싸움꾼, 말썽꾸러기...
상당수 목사 아들이 어린 시절에 듣는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어쩌다 내가 목사 아들로 태어났나,
언제 내가 이 지옥과도 같은 교회 울타리에서 벗어나나,
많이 반항하고 말썽 부리고 엇났습니다. 친구들 입에서
"목사 아들이" 하는 순간 몸을 날려 덤비고 깨지고
코피가 났어도 집에 가서는 "넘어져서 그랬다"라고
둘러댔습니다. 이제 돌아보니 그러나 결국은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 길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龍) 목사의 아들들인 우리 아버지대에서 목사님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 분들이 '이유있는 반항아' 가 아니어서 인가 봅니다. ㅎㅎ
(龍) 할머니한테 물어보았죠. 만약 아들 여섯 중에서 목사하겠다는 놈 나오면 “다리 몽뎅이를 부러뜨려 놓는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얼마나 삶이 힘드셨으면 사모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셨을까??
(愛)할머니는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 너무 힘드셔서, 어머니가 시집오시니 엣다, 하고 전권을 주신 후 뒤돌아 보지도 않으심.
아버지가 철도병원 의사월급 타오시면 할아버지께 월급봉투 드리고, 할아버지가 쌀 한가마 사주신 후 빌린 돈들 갚으시고 나면 빈 봉투. 어머니는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나물 뜯어 반찬하셨다고.
(愛)그 추운 평양겨울, 혿겹 광목 옷입고 다들 어춥다 벌벌
남편 목사님은 독립운동한다고 맨날 감옥에 들어가 매맞고 있으니.. 할머니 살심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어머니 박정희 님이야 결혼 전 교사생활 또 아버지 애맹사업으로 궁즉통도 터득하셨겠고...
(愛)(어머니 박정희 님이 살으신 모습): 이렇게 살림하는 한편, 달력이 귀한 때니까 수채화로 12달 그림을 그리셔서 달력을 만들면,
철도병원 간호원들 사이에 철지난 달력 갖기 쟁탈전 있었다고! 능라도 을밀대... 너무 세상이 아름다워서 그림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셨다 합니다.
위 얘기는 신혼 시절 어머니 모습입니다.
아들6명 가난한 목사님 댁은 살림이 너무 힘들었는데, 맏며느님도 돌보지 않는 살림을 둘째인 어머니는 거리낌 없이 맡으셨지요.
2014년 12월 3일밤4일시작 싯점에 어머니는 귀천하셨는데,
그때까지도 정신이 말짱하셨어요. 그때까지 그림 그리시고, 또 그림교육비로 벌으시던 노인이셨죠.
ㅎㅎ어머니는 노인이라는 말이 안어울리는 이쁜 할머니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림그리기 위해 귀천하시던 전날에는 아예, 침대에 앉아 그림그리도록 화판 등 떨어지지 않게 다 묶으라...고 까지 하심)
위에 금재 후배가 쓰신 것처럼... 우리 어린 시절에는 끼때마다 밥상을 세개를 폈어요.
약 25명의 밥식구들...
어머니는 찌그리거나, 한탄하고 팔자타령하거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죠. 물론 늘 살림도우미는 있었구요,
모두들 즐겁게 일하고.... 더하여,
-그림 그리고
-수 놓고
-뜨개질하고
-바느질 하고
-영어공부, 산수공부
도우미들이나 간호원들이나 모두 박정희School에서 튼실해졌습니다.
사진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