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캄보디아 장교 사므디의 결혼식에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떠난 길이었다.
그는 육군대학교에서 내게 한국어를 배우고 귀국한 위탁교육 장교다.
그리고 캄보디아 역사상 최연소인 스물여덟 살에 육군대령으로 진급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총각이다.
유난히 나를 많이 따르고 좋아해서 친하게 지냈는데,
언제든 결혼하게 되면 꼭 보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사므디와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잇디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40대 초반인데도 아직껏 소령이다.
아무 때고 내가 오기만 하면 캄보디아 구경은 자기가 책임지고 시켜주겠다고 했던
마음결이 고운 제자가 약속을 지켰다.
우리는 결혼식을 보기 전에 미리 잇디의 승용차를 타고 앙코르와트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리와 한국어로만 소통하려고 애썼다.
그의 한국말은 그리 유창하지 못했지만 나는 다 알아들었다.
외국인을 오래 가르치다 보면 눈빛만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가 있다.
그래서 학생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한국어 문장으로 만들어서 들려주면,
자기 생각을 어떻게 알았냐며 무척 신기해하곤 했다.
한국에서 착실한 학생이었던 그는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모범생이다.
공짜로 한국어과외라도 받는 양 즐거워하며 내 말을 열심히 따라 한다.
한국어를 잘하면 캄보디아에서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프놈펜에서 앙코르와트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도로사정도 좋지 않았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 자동차와 자전거, 마차와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니 눈치껏 알아서 서로 비켜가며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잇디는 운전을 하면서도 창밖 풍경들을 열심히 설명해 주려고 애썼다.
가다가 배고프면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과일도 맛보며 천천히 가니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루해가 다 빠졌다.
한낮이 되면 너무 더워서 다니기 힘들다고,
이튿날 우리는 동이 트기도 전에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유적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잇디가 이끄는 대로 주요 장소만 골라서 둘러보고,
햇살이 채 퍼지지 않은 7시 경에 사원에 도착했다.
천장도 없고 돌로 된 골조만 남은 반쯤 무너진 사원이 처절하게 훼손된 채로 우리를 맞았다.
남아 있는 돌에 새겨진 정교한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감탄하던 중이었다.
사원 한쪽 구석에 웬 사람들이 빙 둘러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남루한 차림의 여자가 날이 무디어 보이는 삭도로 남자아이의 머리를 밀고 있었다.
벌써 반 이상이나 밀어낸 것으로 보아 그들은 동이 트기 전부터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곁에서 남자 아이 두 명과 바싹 마른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는 잡혀 온 짐승처럼 묵묵히 머리를 대주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어림잡아 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면도를 위해서 비누질을 한다거나 젤 같은 것을 바르지도 않고 마른 털을 억지로 박박 밀어내고 있었다.
여자의 무딘 칼끝에서 아주 조금씩 아이의 머리털이 밀려 나왔다.
비록 피는 나지 않았지만 아이의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제사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처럼 아주 진지했다.
내가 바짝 다가가서 한참을 있었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머리를 밀고 있는 아이가 비스듬히 누운 채로 두어 번 나를 힐끗 쳐다 볼 뿐이었다.
초점도 없는 눈이 너무 착해 보여서 슬펐다.
나는 그들이 가난 때문에 아이를 승려로 만들려고 준비하는 것이리라 추측했다.
아니, 어쩌면 여기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교묘한 구걸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들 손에 얼마를 쥐어 주면 아이를 놓아 줄까?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아마 아이를 승려로 만들려는 모양인데 왜 하필 여기서 머리를 깎을까요?
구걸하려고 저러는 거 같기도 하네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 내 시선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못하자 친절한 잇디씨가 얼른 뛰어갔다.
그리고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과 이야기를 한참 했다.
곁에 있었어도 캄보디아 말이라 알아듣지 못했을 테지만 멀리서 바라보며 기다리려니 궁금증이 더 일었다.
"저 아이는 승려가 되려는 것이 아니래요.
지금 머리를 깎고 있는 저 여자가 중한 병에 걸렸을 때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자기의 병을 낫게 해 주면 이 사원에 와서 아이의 머리를 깎겠다고 말입니다.
다행히 여자의 병이 다 나았고,
오늘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저러고 있답니다."
“아니, 뭐라고요? 자기 병을 낫게 해 주면 아들의 머리를 밀겠다고 서원을 했다고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무슨 염치없는 경우란 말인가.
자기 병이 나았으면 제 머리를 밀어서 감사의 표시를 할 것이지,
왜 죄 없는 자식 머리를 깎는단 말인가.
제가 낳았으니 자식은 자기의 분신이요 자기 소유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 착각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잉태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남의 일에 괜히 내 울화가 치밀었다.
그나저나, 여자는 세 아이 중에서 왜 하필 그 아이의 머리를 깎겠다고 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여자에게서 제 목숨보다 더 귀한 자식을 드리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지극한 모성이 때로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다.
울적한 마음으로 사원의 계단을 내려오려니 올라갈 때 보다 배나 더 힘들었다.
김 희재 : 계간수필 천료 (1998년). 한국문협, 국제팬클럽 회원.
산문집 <죽변기행> 외
그러게 ~ 왜 하필 그아이 머리였을까나~ 짠해 죽것네. 지극한 모성이 결과는 어리석을수 있다는거 공감하고 반성도 하네.
제가 다니는 성당에 부임하신 신부님은 정말 잘생긴 미남에
섬섬옥수같은 하얀 손이 "신부님, 손좀 잡아봐도 되요?"ㅎㅎ
그 옛날, 신부님이 어려서 할머니 손잡고
시외버스타고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던 길이였데나?
가던 중에 버스전복사고가 났었데요.
신부님의 부친이 연락받고, 응급실로 가시다가 톨금에 걸려서
여관에 묵으며 날 밤을 새는데
신 새벽에 어딘가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리더래요.
소리나는 방향으로 절과 기도를 하면서
"당신 어머님만 살려 주신다면, 함께 병원에서 살아나는
맏아들을 하느님께 무조건 봉헌하겠습니다!" 하셨데요.
신부님 할머님도 살아나시고
본당 신부님은 그후로 하느님께 당연히 바쳐졌데요.
그후로 본당신부님은 또 한번
큰 차사고가 났었는데 살아난 것이 기적이란 말밖에
다른 말이 필요없이 말짱하셨데요.
차는 완전 폐차처분였는데도요.
윗 글을 읽으면서
내둥 우리 신부님의 잘생긴 얼굴이
오버랩 되네요.
이 글은 <한국 문학시대>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