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수필>
솔바람 소리
박찬정
교실 안은 서먹한 분위기다. 제 옆의 짝보다 같은 중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더 가깝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중학교 동창을 찾아 다른 반으로 원정을 가서 회포를 푸는 아이들도 있다. 복도에서 서로 맞잡은 두 손, 눈물 없는 상봉 모습도 흔히 보는 풍경이다. 둘째 줄 내 자리 주변 아이들의 출신 중학교는 전부 다르다. 내 짝은 영화여중, 앞자리 둘 중 한명은 인성여중, 한명은 군산에서 유학 왔다. 뒤의 두 명은 각각 인화여중과 소사(부천의 옛이름) 중학교 출신이다. 반 전체 구성원이 다 그렇다. 낯이 설 듯 타이 매는 것도, 검은 쉐타에 흰 데토론 깃을 다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그 해 서울과 부산은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추첨제로 바뀌었다. 서울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던 지방 수재들이 인천으로 대거 몰려왔다. 안양, 수원, 의정부 등 경기 일원은 물론 홍성과 군산, 상주에서도 왔다. 다 기억조차 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에서 전교 1,2등 하던 ‘공부의 신’이었다. 어차피 대학 진학은 서울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울 가까운 인천 명문고에 온 것으로 짐작한다. 혼자 자취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교 가까이에서 하숙을 하거나 친척집에 있거나 형제가 같이 있기도 하고, 할머니가 손주들 밥데기로 올라 온 경우도 많았다.
경희는 군산에서 올라와 언니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경희네 집은 군산 근처 옥구군의 대농가라고 했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격인데다가 우리에겐 낯 설은 전북지방 사투리를 써서 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 했다. 곡창지대 대농가에서 객지에 나가 공부하는 딸들에게 쌀을 감질나게 보낼 리 없는데 사흘이 멀다 하고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왔다. 아침밥도 굶었다고 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 한 이유는 늦잠을 잤거나 연탄불이 꺼졌거나 둘 중 하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연탄불이 꺼져서 밥을 지을 수 없었단다. 경희는 그런 날이면 매점에서 <커플> 빵 두 개를 사다가 먹으며 하루 허기를 때웠다. <커플>은 식빵 두 장 사이에 딸기잼이 찔끔 발라진 샌드위치 빵이다.
이 나이 먹어 돌이켜보니 그때 도시락 나눠 먹을 생각을 왜 안 했는지 후회된다. 지금 같으면 절반을 덜어주거나 도시락과 빵을 바꿔 먹기도 할텐데, 그때는 왜 모른 체 했을까. 인정머리가 없었던가. 모두들 도시락 하나로 온종일 버텨야 하니 앞자리 아이의 배고픔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나 보다. 지렁이 갈비뼈도 씹어 먹을 열여섯 살 나이 아닌가. 경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다시 인연이 닿으면 그때 나누지 못한 밥 인심을 마음껏 나누고 싶다.
진숙이는 의정부에서 통학했다. 새벽 다섯 시 의정부 가능동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의정부 터미널에서 종로5가까지 오는 버스로 갈아탄다. 종로 5가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로, 서울역에서 동인천까지 경인선 기차를 탄다. 매일 왕복 여섯 시간 차를 타는 원거리 통학길이다. 고1 여름방학(1974년8월15일)때 지하철 1호선과 전철이 개통되었다. 2학기부터는 갈아타는 횟수와 시간이 조금 줄었지만 학교 오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다. 종점에서 타고 종점에서 내리는 버스와 전철이 진숙이에게는 달리는 공부방이었다. 그때 통학길 흔들리는 차 안에서 공부한 것이 밑천 되어 교육 현장의 수장으로 현역이다.
인일여고 수업 열기는 중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뜨거웠다. 수학 시간이면 나는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문제를 들고 와 선생님을 당황시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수업 마치고 나가는 선생님을 뒤쫓아 가서 미처 못 푼 문제를 묻곤 했다. 두세 명이 몰려가 제 문제를 들이미는 바람에 선생님이 복도에서 쉬는 시간을 다 보낼 때도 있었다. 중3때 바짝 공부해서 겨우 들어 온 나와는 공부하는 범위가 달랐다. 중학교 때는 중상(中上)이던 등수가 고등학교에서는 중하(中下)에서 맴돌았다. 웬수같은 시험은 왜 그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다른 학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보면 되는데 인일여고는 매달 시험을 친다. 게다가 느슨해진 마음 졸라매게 하려고 소풍이나 수학여행 다녀오면 곧바로 시험, 합창대회 끝나면 바로 시험이다. 십대 아직 피지도 못한 청춘이 시험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시험 치고 나면 얼마간은 마음 느긋하다. 노래 잘 하는 친구가 앞에 나가 노래를 가르치면 우리는 따라 불렀다. 명가수는 반마다 장르별로 있었다. 지금도 흥얼흥얼 따라하는 올드팝은 그때 다 익힌 것이다. 막간을 이용해서 하는 선생님이나 남학교 인기투표는 우리가 잠깐씩 웃고 즐기는 오락 중 하나다. 그런 시간은 감질나게 짧았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시험 일자를 발표하면 우리는 매달 있는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빵빵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시험 날짜가 발표되면 공부를 하든 놀든 엎드려 자든 뇌 해마는 시험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수업이 끝나도 도서관으로 향하거나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한다. 창밖은 어둠이 짙어지고, 수학 문제는 짜증나게 안 풀리고, 뱃구레에서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 통일동산 솔바람 소리는 왜 그리 을씨년스럽게 들리는지. 나는 지금도 솔바람 소리가 한가한 신선놀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어두운 창밖과 시험 공부의 지겨움과 그 시간쯤의 허기와 졸음이 겹쳐서 각인된 탓이다.
졸업 30년 홈커밍데이를 마친 다음날 모교 방문 일정이 있었다. 나는 중, 고등학교 6년을 그 교정에서 보냈다. 나 혼자였다면 기억 속에 있는 곳곳을 꼼꼼히 둘러 보았을텐데 우루루 몰려다니느라 그리움을 다 더듬어 보지 못 했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흘렀다. 버스를 타고 동인천에서 내려 눈 감고도 갈 수 있던 길인데 지금은 단박에 인일 교정을 찾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입학 기념으로 심은 해당화는 아직 있을까. 등굣길, 숨이 깔딱 넘어가게 올라야 하는 무수한 계단. 그 아래 모퉁이에서 가끔은 우리의 후레아 치마 속을 힐끔거렸을 후박나무는 어찌되었을까. 동산 솔바람 소리는 여전한지. 그리움이 꼬리를 문다.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난 지금 너무 멀리 와 있다. 오늘밤 꿈결에 더듬더듬 가 볼까.
너무 잘 써서 제외되었나 보다.
난 영원한 찬정 작가의 팬.
입학 초 교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지네.
그래, 정말 공감이 되는 일이 많아.
난 인천에서 좀 변두리에 속하는 학교 출신이지.
말하자면 동인천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라고.
중학교에 가기 전에는 동인천쪽에는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배다리까지는 가 봤지만.^^
중앙시장에서 산 헌 교복을 입고 주눅까지는 안 들었지만 뭔가 서먹했던 입학식,
칼바람이 세차게 부는 운동장에서 하나도 안 추운 듯 빛나던 아이들을 봤을 때 느껴지던
이질감 그런 거 선명히 기억난다.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던 한 시절이 막을 내리고 뭔가 다른 장면이 시작되는 시기였을 거야.
우리 중학교 시험 볼 때도 마지막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다는데 난 그런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고 6학년 일년 내내 공부만 하고 하나라도 틀리면 매맞는 게 너무나 이상해서 참 어리둥절하고 억울했어.
고등학교였으니 그 절박함이 더 했겠네.
난 성적이나 뭐 이런 건 아예 관계도 없던 사람이었기에;;(많이 심했지) 그런 건 잘 알지도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14기의 인일여고 입학은 참 어렵고 대단한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네.
난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늘 답답하고 갑갑하고 그랬거든.
선생들의 권위의식이라든지 규율과 해야 할 과제, 내가 볼 떄는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것을 강요당하는 괴로움, 불편한 교복 이런 게 참 싫었어.
이제 와 생각하면 시대 탓도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글을 알면서부터 고등학교까지 그 이후로도 바뀌지 않던 정치 체제나 이유없는 두려움 속에서 늘 감시당하는 느낌, 늘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감추어야 했던 자연스럽지 않은 성장기. 그래서 더 혼란했던 20대.
그런 모든 복잡한 감정의 반항심이 학교를 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
물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나 헤쳐나갔던 여러 일들에 대한 감사는 있지만 학교 체제에 대해서는 늘 혐오스러운 감정이 많이 있었어.
내가 선생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상상도 못 했어.
정말 싫어하는 직업이었거든.
뭔가 아무튼 그랬어.
나의 정신 수준이 낮았던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 실제로 물론 그런 면이 있었을 수도 있지. 불성실함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고, 분방한 성격 탓일 수도 있고.
교사 할 때도 애들은 무조건 귀하고 좋은데 선생은 그렇지 않더라고.
치졸한 권위의식으로 애들을 다그치거나 때리는 사람들, 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용서가 안 되더라고.
많이 싸웠지.
지금은 선생과 학생들의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생은 어른이잖아.
애들은 다르잖아.
이제 와 그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선생들이 얼마나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나 이런 걸 많이 느껴. 노력이라도 말야.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했네.
별채처럼 뚝 떨어져 있던 건물 앞 공터에서 고무줄 하던 일, 고무줄 하다가 이상하게 배가 아파서 화장실 갔다가 알게 된 생리.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역시 그리움인가.
우야든둥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가 이렇게 어른이 되어 만났다는 거, 그게 너무 귀하게 생각된다.
잘 읽었소 박작가.
유자 정리도 끝났을 테니 이제 글도 다시 쓰시고, 우리는?
기다리고.^^
그땐 더욱 더 나만 알았던 거 같아 지방에서 온 친구를 이해해주고 배려해 줄 것을 하는 아숴움이 나도 가끔 떠올라 ~~수학 재시험도 봤던 거 포크댄스 시험은 재재재 시험에도 통과가 안돼서 최기숙선생님이 "됐어" 하시면서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시던 거 생각난다 ~~어쩜 이리 생생하게 잘썼니? 난 기억도 잘 안 나는 데 기억하기가 싫은 거 같기도 하고
이렇게 다시 올려주어 우리를 보게 해주니 우찌됬던 좋구먼.
나도 영원한 찬정이 애독자야.
난 5기 친구들 몇명이 너도 내보라고 하더만 학창시절을 생각하니 몰래 영화귀경 다니던 것만 생각나서
포기했어.
한번은 하루 결석하고 서울로 영화보러 갔던 생각이 나니 지금 생각하니 그게 문제아지 뭐여.
그때 가자고 부추기던 친구도 샘을 끝까지 해서 지금 연금으로 산다네~ㅎ
극장가서 선생님 만나면 영사실 가서 숨어서 보고 갔으니~
영사실 아저씨가 또 왔냐? 웃으시던 기억도 나고~
울 아버지가 한전 다니셨는데 중 2때 전라도 광주로 발령이 나셔서 거기 사택으로 전근 가시면서
우리집에 작은 아버지를 와서 살라하시고 나를 맡기고 가셨으니 엄마랑 동생들 보고 싶은 허전한 맘을 영화로 달랜거 같아.
고 3이 되서야 다시 발령받아 인천으로 오셨는데 내 성적은 엉망이니 엄마가 우셨던 기억도 나.
인천여중 못다니는 것이 아까워서 나를 놔두고 가셨건만~ㅎ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아주 잘 표현했구만 ~ 속상하네.
다른 글 꼭 읽어봐야겠네.
여기 애독자 또 있지요.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저도...
저희 7동기 김용순이 부평역앞 로터리에 대한극장집 딸였어요.
기차에서 내려선 우리 몇 명을 극장에 넣어주고 갔지요.
제목도 안 잊히는 신영균,태현실 주연의 '딸' 인데 학생관람불가 였지요.
내용이 그리 불가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기억인데...
신나게 보다가 들켰지요.
다들 나오라고해서 복도인가로 나갔는데 어느학교냐고?
부평의 북인천중학교랑 교복이 비슷했거든요.
곤색 타이리본 매는 것이요. 해서 북인천여중이라고 거짓말을~ㅎㅎ
오마이갓!
하필 우릴 잡은 단속 규율선생님이 그학교의 선생님이실 줄이야~~!
잘못했다고 훌쩍거려서 겨우 훈계듣고 방면되었었지요.
억울하게도 영화는 끝까지 못보고..더구나 공짜였는데 ~~
그후론 다시는 학생불가는 발도 못대고 살았었답니다.ㅋㅋ
찬정님의 글을 읽으면서...
타임머쉰 타고 인천여중 인일여고로 날라갔더랬어요.
6년의 기차통학과 언덕길을 오르면서 뚱뚱해진 종아리가,
골프선수 박세리의 다리통같단 소리를 여기서 듣게되었고...
비록 낙제는 겨우 면한 공부실력의 소유자이지만,
나름 인천여중 인일여고 나온 자부심을 갖고 여기 캐나다에서도
씩씩하게 근면성실하게 잘 살아냈고 또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인천여중 인일여고여 영원하라 ~~~!!!
저 북인천여중 나왔는데요 저 다닐 때 규율부장선생님은 인일여고에도 계셨던 분이고 의사지바고 보려고 서울까지 도보로 가셨던 적도 있다고하셨어요 눈이 와서 철길이 막혀서요 암튼 영화광이셨어요 키 크시고 마른체형이셨는데요 별 얘기 다하게 되네요 ㆍ
멀리 살다보니 인일여고 동문행사에 한번도 참가해 볼 수 없었지요.
개교 60주년 행사 시, 수필 공모전은 멀리 사는 저도 가능하여
졸고를 보냈습니다.
그래도 몇날 며칠을 머리 쥐어뜯어가며 쓴 것인데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우리 봄날에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