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활짝 펴고

                                                                                                                                                   김 희 재

 

 11월 하순 치고는 쌀쌀한 날이다.

햇살이 확 퍼진 오후가 되서야 따뜻한 털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산에 오른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동네 야산이지만 빽빽한 숲 사이로 난 산책로는 명품이다.

구성지게 흐느껴 우는 것 같은 산비둘기 소리가 내 귀에는 오랜만이라며 반기는 것으로 들린다.

저 녀석도 여전히 잘 있구나 싶어 나도 반갑다.

행여 수북한 낙엽 잘못 밟고 미끄러질세라 발가락에 신경을 모은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숲길을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다섯 바퀴 쯤 돌고 나니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턱에 닿는다.

좀처럼 땀이 잘 나지 않는 내 몸이 드디어 땀구멍을 활짝 열고 노폐물을 확 쏟아낸다.

날아갈 듯 기분이 상쾌하다.

 

숲속 산책길엔 체육공원에 설치해 놓는 운동기구들이 띄엄띄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옆으로 뛰는 그네>다.

<롤링 웨이스트>라는 이름표가 버젓이 붙어 있지만 나는 그냥 그네라고 부른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두 손으로 바를 잡고 서서 상체는 고정한 채

다리의 반동을 이용해 하체만 좌우로 움직이면 자연스레 허리 운동이 되면서

뱃살도 빠지고 유산소 운동까지 되는 기구다.

늘 비어 있어 언제든 탈 수 있고,

한낮 땡볕도 무섭지 않게 나무 그늘 밑에 있어서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발판 위에다 두 발 가지런히 모으고 슬슬 양쪽으로 구른다.

몸이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익숙한 리듬감에 마음이 설렌다.

흔들흔들 리듬을 타며 내 맘대로 표정을 지어 본다.

입도 크게 벌려 보고 치아가 8개 이상 보이도록 미소도 지어 본다.

다 된다.

내 얼굴 어느 한 곳 찌그러지는 데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된다.

정말 신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까풀이 바르르 떨리는 증상이 나타난 것은 꽤 오래전 일이었다.

처음엔 그저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무조건 쉬면 나을 줄 알았다.

그래도 낫지 않아 영양제도 사 먹고 용하다는 한의원도 찾았다.

한약을 먹고 일주일에 두세 번 씩 꾸준히 침도 맞았지만 경련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올해 들어서는 남이 알아볼 정도로 입이 실룩거리고 한쪽 눈이 제 멋대로 감기는 바람에

책 읽기가 어렵고 운전도 힘들어 졌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눈 맞추는 걸 꺼리게 되고,

강의할 때도 실룩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해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한의사 말 대로 이 병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자칫 그대로 두었다간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회생활을 못하겠다 싶어 종합병원 신경외과를 찾았다.

내 얼굴을 보고 의사선생님은 단번에 <반측성 안면경련증>이라고 진단했다.

안면 신경이 눌려서 생긴 병이란다.

신경을 누르고 있는 혈관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으니 머리 MRI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난 그 말을 얼굴에 있는 신경을 간단히 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MRI 검사결과를 보러 간 내게 해상도 좋은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던 의사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한쪽 얼굴이 제 멋대로 떨리는 건 여기 보이는 안면 신경이 혈관에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수술하면 되는데 문제는 바로 이 뇌동맥입니다.

다른 혈관에 비해서 이 부분이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것이 보이시죠?

제 눈에는 이게 <뇌동맥 꽈리>로 의심됩니다.

<파열성 뇌동맥류>라고도 부르지요.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조기발견이 어렵고, 일단 터졌다 하면 거의 즉사하기 때문에 아주 골치 아픈 놈입니다.

이 분야 전문 교수를 연결해 드릴 테니 정밀검사를 더 해 보시고

꽈리가 맞으면 무조건 그것부터 치료하셔야 합니다.

다행히 꽈리가 아니면 제가 바로 안면 경련을 수술해 드리겠습니다.”

 

졸지에 기습을 당했다.

내 머릿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있는 것 같단다.

지금 그깟 얼굴 실룩거리고 눈이 찌그러지는 건 문제가 아니란다.

안면 경련 주치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즉사’라는 단어가 가슴에 콱 박혔다.

기가 막혔다.

 

뇌혈관 전문 교수는 혈관 모양이 너무 애매해서

겉에서 찍은 MRI, CT 사진만으로는 진단하기 어렵다며

사타구니 대동맥을 통해 가는 관을 삽입하고 내부에서 직접 뇌혈관을 찍는 조영촬영을 해 보자고 했다.

2박 3일 입원해서 받는 검사란다.

자기가 보기엔 아닐 확률도 반반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설령 꽈리라 해도 백금 코일을 채워 넣는 시술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마음이 가볍다.

환자를 배려해서 온화하게 표현해 주는 그의 태도가 정말 고마웠다.

검사 날짜는 3주 후로 잡혔다.

 

벼르는 매가 맞는 매보다 더 아프다고 했던가.

검사를 기다리는 3주 동안 나는 혹독한 마음 수련 과정을 겪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학교 강의를 정리하고,

가족들에게도 걱정 끼쳐 미안하고 안타까운 내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 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고

너무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지켜주시길 기도했다.

생사가 갈리는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된다.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허둥거리게 된 순간에 나는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십사고.

 

검사 결과 다행히 꽈리가 아니었다.

혈관 모양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이란다.

막상 아니라니 괜히 안 해도 될 죽을 고생을 내게 시켰나 싶은 원망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웬만한 수술보다 더 위험한 검사였지만 이참에 내 뇌혈관엔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도리어 감사할 일이라고 말이다.

 

 

안면 경련 수술도 결코 간단하다고 볼 수 없는 까다로운 뇌수술이었다.

귀 뒤의 피부와 근육을 절개하고 두개골에 동전만한 구멍을 뚫은 후에,

척수막을 갈라 척수를 조금 빼내고 나서 뇌를 살짝 끄집어내 시야를 확보한 다음,

수술 현미경으로 보면서 한다고 했다.

수술 부위가 뇌의 가장 깊은 부분인데다 여러 신경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자칫 잘못하면 치명적인 장애들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워낙 연약하고 예민한 것이 신경이라 살짝 스치기만 해도 문제가 된단다.

게다가 네 명 중 한명 정도는 수술해도 낫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간단한 안면 수술이 아닌 뇌수술이라는 사실도 기가 막히지만

수술로 낫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더 심란했다.

너무 겁이 나서 수술을 그만 두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점점 심하게 찌그러지는 얼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더 끔찍해서

긴 고민 끝에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또 기도했다.

힘들고 까다로운 수술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리라 믿고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았다.

마음이 담담하고 평안해졌다.

 

전신마취 5시간 만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마취에서 깨고 보니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더냐 싶게 실룩대던 증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차하면 생길 수 있다던 장애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주치의도 놀랄 만큼 수술 경과가 좋고 몸 회복도 아주 빨랐다.

내 증상이 좀 심한 편이어서 예후가 나쁠까 봐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단박에 낫게 되니 모두들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모든 게 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요 응답이었다.

 

 

수술하고 열흘 만에 퇴원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아직 수술 부위가 덜 아물어 머리는 좀 아프지만 견딜만하다.

내 발로 걸어서 퇴원하던 날,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다 새롭고 감격스러웠다.

게다가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 와 산책을 하고 그네도 탈 수 있게 되니

내가 겪은 일이 다 꿈만 같다.

이제부터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겠다.

 

어느새 아파트 사이로 동짓달 짧은 해가 넘어가고 있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던 그네도 멈췄다.

내 마음대로 짓고 싶은 표정 다 지으며 얼굴 활짝 펴고 걷는 발걸음이 참 가볍다.

 

                                                                                                                       (계간 수필 봄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