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2.김춘선
배꼽산 진달래/미사 신금재
배꼽처럼 산이 볼록 올라왔다고 사람들은 그 산을 배꼽산이라 불렀다.
배꼽산 골짜기로 내려가는 평평한 산허리에는 여러 개의 기름탱크들이 놓여있고
숫자와 영어 알파벳이 이상한 나라의 부호처럼 기름탱크 전면에 표시되어있었다.
우리 초등학교 또래 아이들 키에 대여섯 배도 넘는 높고 날카로운 철조망을 두른 울타리에는
초소마다 얼룩무늬 군복의 미군들이 총을 들고 삼엄한 불침번을 서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탱크들 안에는 엄청난 기름이 들어있고 북한이 쳐들어와 전쟁이 일어나면 저장하였던 그 기름을 전투 비행기에 넣어준다고 하였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 안으로 기름을 넣어줄수 있을까,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제트기 날아간 하얀 구름 자국이 하늘 기차길처럼 보이던 그 시절
어려서부터 내 눈에 각인된 배꼽산은 동서냉전의 이념처럼 단단하게 굳어보였지만 그래도 인자한 아버지 얼굴로 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 기름탱크라는 것은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건이고 언제나 저 산허리 평평한 곳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내처 무시하며 진달래 피는 봄을 몇 번 더 맞이하고 뻐꾸기 진종일 울어대는 여름날이 몇 번 더 가버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해 겨울 새벽 그 기름탱크는 우리집 현관문을 갑자기 두드리며 찾아왔다.
잠결에 몸이 서늘해지며 한기를 느꼈을 때 아랫집 영자네 엄마가 문 밖에 서서 우리 엄마와 무엇인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고있었다.
무슨 소리인 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엄마가 겨울 방수 잠바를 찾아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 고무장화등을 서둘러 찾기 시작하였는데 심상치않은 겨울 새벽 분위기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나는 짐짓 애써 모른 척 이불을 끌어다가 머리 위까지 덮었다.
저런 장비들은 엄마가 조개고개를 넘어 송도 앞바다에 바지락 잡으러갈 때 쓰는 건데... 이 새벽에 왜 저런 걸 찾을까...이상하다.
그러나 새벽잠에 졸려 쏟아지는 잠의 무게는 그 궁금증을 내려누르고도 남았다.
곁에 서있던 아버지의 근심어린 표정으로 보아 두 여인들은 무언가 당당하지않은 일을 모의하러나간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는데
엄마의 구부러진 등 뒤에 대고 조심하라우, 아버지의 황해도 사투리 섞인 억양이 차가운 별빛에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밤 새 꿈 속에서 희미한 모습의 엄마는 등뒤로 밀려들어오는 밀물을 자꾸 돌아보면서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고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선잠이 들었던 나는 겨울 햇살이 창호지 안쪽을 뚫고 방 아래까지 찾아온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두런두런 말소리에 눈을 비비며 잠이 깨었다.
동상이구먼... 저런 쯔쯔쯔...
더운 물에 담그면 안된다는데두... 손이 시려워도 찬 물에 담그어 얼음을 빼 내라우...
엄마는 세수대야에 손을 담그고 있었고 아버지는 연신 대야의 물을 찬 물로 갈아대고 있었다.
배꼽산 기름탱크에서 간 밤에 기름 유출사고가 나서 흘러내린 기름이 송도 앞바다 갯벌로 고인 것이었다.
미군부대에 다니던 영자 아버지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듣고 영자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함께 그 새벽 송도 앞바다로 나가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 바다 물을 가르고 동동 떠오른 기름을 걷어내는 작업을 한 것이었다.
엄마가 떠왔다는 기름이 문 밖에 있는 통 속에 담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선홍색이 감도는 맑은 피색이었다.
휘발유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너무 맑아서 슬퍼보이는 맑디 맑은 기름이 지난 해 겨울 밤새 엄마가 막내동생을 낳느라고 진통하며 흘렸던 붉은 피로 보였다.
막내 동생을 보던 날 아침,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우리 동네 하나 밖에 없던 장씨네 구멍가게로 달려가 엄마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사오는 심부름을 하였다.
그 때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서둘러야하고 걸어가면 안되고 뛰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차 중국 화교네 농장 옆길 지름길로 마구마구 달려갔다.
구정이 다가오는 음력 정월,
화교네 농장 들판에는 얼음인 지 눈인 지 구분이 안되는 하얀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동상걸린 우리 엄마 손등 같네... 하는 생각이 내 하얀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밤을 세워 들려오던 엄마의 신음 소리, 저러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는 거 아닐까,
숨을 죽이며 엄마 신음 소리에 밤새 귀를 기울였다.
내가 빨리 달려가서 장씨 아저씨네서 파는 그 어떤 물건을 사오면 엄마의 고통은 사라진다, 마치 이상한 말로 주문을 걸어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처럼...
그 해 겨울이 다 지나가도록 엄마는 손에 걸린 동상으로 고생을 하셨다.
마당이 아주 넓었던 돌축대 위의 우리 집 마당에는 여전히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이웃집, 노름판이 겨우내 벌어지던 재수네 놀러가서 이, 서캐등을 옮아오면 아버지는 양지쪽 마당에서 내 머리카락을 뒤져가며 서캐를 잡아주셨다.
엄마의 동상걸린 손이 점점 나아져가면서 그렇게 봄도 다시 왔다.
그해 봄에 나는 무슨 알러지에 걸렸는지 잔기침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기 때부터 배앓이등,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나를 엄마는 미군부대 앞에 있는 소아과에 데려가셨는 데 가기만 가면 배아프던 것이 낫는다고 병원 이름 00 의원 대신 골통대, 라고 불렀다.
그런데 잔기침은 골통대를 가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 이발소, 사랑방에 자주 오시는 최샨이라 부르던 고향 친구 분-나중에 피난을 함께 온 사촌오빠와 그분의 딸이 맺어져 사돈이 되었다- 잔기침에는 뭐니뭐니 하여도 그저 진달래 술이 좋지.
이 한 마디에 나는 담배 두 곽 손에 들려져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배꼽산 철조망 안으로 넘겨졌다.
철조망을 넘느라 몸이 거꾸로 된 탓도 있지만 기름탱크 주변으로 학교 운동장만큼 펼쳐진 분홍빛 진달래가 눈 앞에 흐드러져 보이는데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하였다.
동네에서 바라볼 때는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보여서 마치 커다란 꽃송이를 던져놓은 것처럼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건 한송이 한송이 마다 나풀나풀 나비처럼 흔들리며 피어난
모두가 하나의 얼굴을 가진 꽃송이들이었다.
자 이제 나의 임무는 진달래 꽃송이를 따는 일, 게릴라 임무를 띠고 적진에 던져진 척후병처럼 내 심장소리가 쾅, 쾅, 들리는 듯 하였다.
산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눈에 띄는대로 뱀도 잡아먹고 쥐도 잡아먹는 그들 군인처럼 나는 손에 잡히는대로 꽃잎을 따서 바구니에 마구,마구 집어넣었다.
산 언덕 아래서 아까 담배 두 곽을 받아 잠바주머니에 급히 집어넣었던 군인아저씨가 낮게 소리치며 불렀다.
아직 멀었나... 빨리 내려오지않고 뭐해...
자그마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옆에서 스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내려가.... 느...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 앞에 보이는 붉은 뱀이 머리를 흔들고 지나가며 순식간에 꼬리를 보이고 달아났다.
와--아--악
진달래 꽃 바구니 집어던지고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아래로 아래로 향하여 달려 내려왔다.
큰 일 날 뻔 하였구나... 다행히 물리지는 않았구만...
철조망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다리를 문질러주면서 날 안아주었다.
안되겠네요, 군인이 다가오더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하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한 바구니 따다 주었다.
그러나 진달래 사건은 다음 사건을 알려주는 전초전에 불과하였다.
진달래 꽃잎을 엿과 함께 섞어 항아리에 넣은 다음 땅 속에 묻었다가 거기서 우러나온 물을 마시면 잔기침이 멎는다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나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하였는데...
땅 속에서 지열로 발효되어진 그 진달래술을 마시자마자 그만 기절을 해버린 것이었다.
온 식구들이 마당으로 뛰쳐나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며 나를 깨웠지만 진달레 술이 너무 독했던 지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기절을 할 때 잔기침도 너무 놀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 진달래술 약효인 지 더 이상 기침을 안하게 되었다.
그 후로 배꼽산에서 미군들이 철수해나가고 이제는 정부차원 주요정책의 하나인 산림녹화 계획으로 그 일대는 그린벨트 지역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미소냉전이 무언지 잘 몰랐고 그린벨트는 더더욱 몰라서 그저 사시사철 배꼽산이 변해가는 모습을 즐기면서 산나물도 뜯으러가고 바위 아래서 벌거벗고 남자아이들과 멱도 감고 가재를 잡으면서 가을 도토리를 따고 겨울 칡을 캐면서 한 해 한해를 그렇게 보내었다.
기름탱크가 있었던 넓고 평평한 그 자리에는 이제 인천직할시에서 개발한 여러가지 운동,체육시설이 들어서있고 우리가 그 옛날 멱감고 가재잡던 골짜기에는 약수터가 들어서있다.
서울로 가던 사신들이 드나드는 길목이었다고 붙여진 공식이름 연경산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입에서 맴도는 영원한 이름, 배꼽산으로 부른다.
이 쪽 봉우리에서 저 쪽 으로 걸어가던 길목, 능선자락에는 막걸리 파는 아주머니들이 진을 치고있다.
상전벽해라고 하였던가...
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되는 대신 바다 위로 세계 최대라는 영종대교가 휘돌아가고있다.
공항에서 동생집까지 가는 동안 바다 위의 공중길을 놀라움과 신기로운 표정으로 바라다보면서 와. 와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는 입을 다물지못한다.
배꼽산 아래 우리가 살던 오동배기 동네-오동나무가 많았던 그 동네에 지금은 운전을 배우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운전학원이 서있고 그 옆으로 병무청 빌딩이 군인처럼 차렷, 자세로 서있다.
우리가 중국 노래를 배우며 놀던 화교 춘서방네 농장이 있던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있다.
그런데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난 작은 샛길로 나의 눈길이 머문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GNP가 얼마라고 해도 수치에 어두운 나는 저게 무슨 소린가ㅡ 하듯이 그 사이로 보이는 낮아질대로 낮게 보이는 판자촌의 어두운
그림자
배꼽산의 기름탱크들이 사라져가듯이 저 판자집들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함께 진달래꽃처럼 활짝 웃는 날은 언제 오려나
아! 너무 좋은 글을 아침에 읽네~~~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서둘러 하고 들어와 보니 금재씨의 배꼽산 글이 있네.
어쩌면 정말 이렇게 기억을 잘 할까?
정말 아름답고 귀한 글이다.
배꼽산이 그럼 문학산일 터인데.....
실은 나도 거기서 살았었네.
하지만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때였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아.
거기서 우리 동생이 태어났다고 하던데.
그 때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한테 어린 내가 달려가
아부지 도련님 났대요 도련님 하는 소리가 꼭 도둑님 났대요로 들려서 웃었다는 이야기 들었어.
난 기억이 안 나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없는데, 우리 언니들은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서인지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것 같더라고.
조금 생각나는 게 있어.
큰언니가 인형을 잘 그려서 동네 아이들이 언니 방 앞에 죽 서 있으면 아이들에게 반으로 접은 인형 그림을 그려 주었던 일.
잘난 체 하듯 코를 벌름거리며 그림을 그리던 언니가 자랑스러웠던가......
또 하나
크리스마스였는데 암튼 굉장하게 쌓인 눈을 밟고 교회에 갔어.
유일하고도 이질적인 문화시설이었던 거 같아. ^^
음악이 있고, 난로가 있고, 이국의 묘한 냄새가 있는.
뚫어진 양말을 오그리며 마룻바닥에 앉아서 올갠 소리에 맞춰 노래도 하고 나무 장작 타는 소리도 듣고.....
난 그 때 왜 <내 모자 세모났네 세모난 내 모자.....> 그런 노래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지?
그거 찬송간가? 착각일 거야.
구체적인 어떤 일을 했다는 생각보다 그저 한 편의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느껴지는 그 기억이
문학에서의 내 유년의 전부지.
큰언니는 아직도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데 문학초등학교 친구들일 거야.
아침에 금재씨의 귀한 글을 읽고 마음이 포근해졌어요.
고마워요. 금재씨~~~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고마운 마음으로 읽을게요.
옥규 선배님
아마도 그노래는 -내 양말 빵구났네, 빵구난 내 양말-- 그 노래를 여러가지 가사로 부르지않았나 싶어요
저는 동일레나운이 있던 건너편 학익초등학교를 다녔어요
봄에 문학산으로 소풍가면 가을에는 송도로, 번갈아 송도, 문학산을 다녔지요
저는 문학산 자락이 레이다 기지로 이어져내린 배꼽산 아래서 살았고 조금 더 가면 조개고개가 송도 앞바다와 이어지던 곳
동양화학이 있던 동산 아래
돌축대가 있고 가을이면 온갖 국화가 만발하던 지대가 높은 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어요
결혼하면서 처음 이사라는 걸 해보고 이민오면서 두번째 이사... 캘거리에 와서 세 번 더...
이제는 이사에 이력이 붙었어요
산길, 이라는 시는 몇년전 이곳 캘거리에서 시화전을 할 때 전시하였는데. 아무도 배꼽산을 모르더니
알아주시는 우리 선배님들 만나 잊고살았던 배꼽산의 추억을 따라가봅니다
선배님, 건안하시기를...
신금재님!
언제 이곳을 다녀가셨는지
남아있는 판자집들이랑 막걸리 파는 아줌마등 꽤 소상하게 알고 계시네요.
조개고개는 우리 대학시절 미팅 장소이기도 했고요.
학익동 그 유명한 집장촌이 헐리던 날
슬프다던 남자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그 곳에서 첫순정을 바쳤다나요.
그러고 보니 그곳에 군인들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생겼나봅니다.
아직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신흥동의 "엘로우 하우스"를 어느 선배님은 꼭 카메라에 담고싶다고 하셨지요.
정말 신금재님 말처럼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아스라히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다시는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오늘
무심히 나눈 이 이야기들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우리를 설레게 하겠지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는 매년 받는 여름휴가를 가을로 미루어 어머니와 함께 지내려고 한국에 갔어요
배꼽산이 변해가는 모습, 송도가 국제도시가 되는 모습, 영종공항 다리 등...
인천 모습이 변해가듯이 우리도 변해가고 어머니도 가는 길 재촉하여 가시었지요
캘거리 문협에서 길, 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다가 산길, 이라는 그 시가 나오고
꿈에도 늘 그리는 배꼽산이 나도 모르게 살아나온거지요
처음에 이민오던 해 캘거리 북쪽에서 살았는데 정이 들어 그런지 그 동네를 못떠나다가 지금은 캘거리 남쪽-인디언 마을이 보이는-동네에 사는데
사는 곳에 정 붙이고 사니 그런대로 괜찮아요
그래도 어린 시절 내가 자라난 동네는 나의 사고, 나의 존재감의 바탕이 되어주는 듯 늘 우리의 정신세계를 붙들고 있네요
캘거리 문협에는 소설을 잘쓰는 분이 계시는데 배꼽산 진달래, 후속되는 이야기 네 편을 이으면 단편이 된다네요
배꼽산 추억을 더 찾아내어 다른 소재이야기를 이어보렵니다
선배님
건안하시기를...
금재야`~!!
이 곳에서라도 만나니 반갑네`~
우리 14기 힐하우스에서 잘 보내고 왔다~
인천이란 곳이 인일의 누구나의 옛 추억인가?
나도 배꼽산 얘길 우리 친정 어머니께 들었던 기억이 있네~~
우리 부모님 신혼 때 살던 곳이 수용소 근처라 했지 아마도~~
학익 감리교회를 다니셨고~~
난 어려서 강화 외가에서 한해인지 두해 있다가
작전동에서 유치원때부터 살았다우~!!
인옥아----
35주년 행사, 부럽데이
문정희 시인이 쓴 하룻밤, 이라는 시가 생각나더라
네가 학익감리교회 이야기 하니 나는 학익초등학교 뒷산 언덕에 있던 학익장로교회 생각나네
5학년 때 이던가
학교 교실이 모자라서 그 교회를 빌려서 교실로 사용하였는데 교회 종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인일여고 1학년 때 김정림-지금은 탄자니아 선교사-로 있는 친구가 하도 교회 다니라고 해서
친구 따라 갔다가 성가대 지휘하던 어느 선생님에게 그만 feel 이 꽂혀 버렸고 그 선생님 미국으로 떠나버린 후에 나는 상사병 걸렸다
인옥아
작전동에는 유치원이 있었네...
금재의 글이 나를 끌길래 쭈욱 읽었건만 왜 난 아무 기억이 없을까?
개성에서 낳아 47일 만에 1.4후퇴때 내려와서
강화를 거쳐
인천 송월동에서 살다가 전동으로 이사해서 살았다는데
자유공원, 홍여문은 기억나건만
시집 올 때까지 쭈~~욱 분명 인천에서 살았는데
배꼽산?
전혀 들은 기억조차 없네.
나 인천에서 산 거 맞남요???
금재의 글을 읽어보니
그 시절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아쉬움만 남는데
부모님도 안 계시니 누구한테 물어볼까???
금재야 `
이제야 글 읽었네.
요즘 부쩍 열심히 글을 쓰는거 같아 보기 좋다.
글도 마음이 동하고 체력도 있어야 쓰게 되는 것이지.
마음이 동할 때 부지런히 쓰셔.
그렇다고 몸을 너무 혹사하지는 말고...
연작으로 쓰게 될 배꼽산 이야기 기대할게.
나도 사실 배꼽산이란 이름은 첨 들었어.
광숙 언니처럼 인천의 다른 동네에서만 살았기 때문인가 봐.
암튼....
오래된 추억 속으로 이끌어 주어 고맙네.
선배님
그렇지않아도 건강이 어떠신 지 궁금하였어요
사실은 이번에 제 3집 동인지를 만들면서 마음이 맞는 네 명의 여자들이 따로 글공부 모임을 만들었어요
열심히 노력한 두 명이 재외동포 문학상을 받았고 저는 조그만 공모전에서 받고...
그 중에 한 명이 책을 디자인하는데, 볼 때마다 책 내라고 채근을 하네요
명분이 없다고 핑계를 대지요
선배님
지난 달에 순영 선배님, 또 5기 선배님, 우리 동기들이 모여서 저녁모임 가졌어요
순영 선배님 여전히 바쁘시고 건강하게 지내신답니다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금재야~~~~
추억의 동산을 우릴 안내하는구나!
난 동인천 한복판에 살아서
추억거리가 많지가 않아
그래도 배꼽산은 알고 있었어.
식구들 모두 편안하시겠지?
아들 내외도 잘지내고.....
건강히 지내며 좋은글 많이 쓰거라!
미선 선배님
여기는 며칠째 계속 눈이 내려요
나무들이 온통 눈에 덮여 크리스마스장식이 되었어요
올 한해가 이렇게 훌쩍-- 가네요
건안하시기를...
금재야!!!
배꼽산이 연경산보다 더 좋은 명칭이요,꿈의 산이다.
나도 네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보니 배꼽산이 더 맘에 든다.
지나간 우리의 세월을 한 눈에 읽을 수 있게 하였구나.
내가 잘 모르지만,
너의 이 작품은 정말 아주 훌륭한 수필이다.
너의 내공에 진정으로 깊은 찬사를 보낸다.
진달래술이 참 독하네.
아침까지 취했었으니....
개발이 보존보다 더 좋은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ㅠ.ㅠ.
금재가~~늘 건강하고 건필하길 빌어 본다.
지난 번의 동생에게 보낸 책은 잘 받았는지?
벌써 12월이다.
한 달 남은 2012를 잘 마무리하렴^^
금재~!
잔잔하게 어린날을 추억해 냈네.
어떻게 그렇게 기억할 수 있는지,
배꼽산....
나도 이름은 들었지만 어디 쯤 있었는지는 잘모르겠고
그냥 오빠들한테 들었었던 같애.
금재의 시,수필이 담긴 책,
내 화장대위에서 네체취가 풍겨져 나오는 듯 하여
들며 나며 들쳐보며 쓰다듬으며 나와 같이 하고 있다.
어릴적....
기억나는건 내가 5살때 남자동생 태어나던날
안방 작은 창사이로 들여다보니
눈이 길름하고 동그랗고 예쁘게 생긴
아기가 누워 있었지.
어젯일 처럼 선명하다.
금재 ~!
지금까지 처럼
건강하고,
맡겨진 일 잘해내고,
글도 많이 쓰고,
늘 풍요한 삶을 살기 바란다.